‘비워진 언어’라는 주제로 시작되는 김유림 작가의 이번 전시에는 어떠한 텍스트나 이미지도 찾아 볼 수 없는 다양한 형태의 책들과 책으로부터 파생된 페이퍼 작업이 등장한다. 이 책들은 대부분 한지로 제작되어 있기에 거의 백색에 가까운 한지 특유의 미색의 색감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작업 중 일부는 한지에 짙은 흑색의 먹이 스며있는 것도 있는데 이 역시 구체적 이미지나 텍스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어떠한 회화적 표현도 생략해 버리고 텍스트와 이미지의 지지체가 되는 지점만을 섬세하게 만들어낸 작업에는 작가가 제시한 주제처럼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고 모두 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작업과 관련하여 작가는 “언어를 찾지 못한 감정들은 마음에 차곡차곡 쌓인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에게 있어 언어화 되지 않은 감정, 혹은 언어화 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마음 깊은 어느 곳에 쌓이게 되는 것에 대해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본디 어떤 문장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텍스트와 그 텍스트의 흐름을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컨텍스트의 관계를 읽어내기 마련이고 이 관계로부터 맥락에 맞는 해석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작가는 컨텍스트 영역을 극도로 강화하고 텍스트에 해당하는 영역을 비워버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텍스트의 영역이 비워져 있으므로 이로 인해 작업에 대해 무한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으나 작가는 컨텍스트 영역을 극도롤 강화함으로써 표면 위로 부상하는 텍스트의 지시적 의미가 무엇이든, 혹은 비워진 상태일지라도 그것을 능가하는 컨텍스트의 지위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자신의 작업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컨텍스트가 마치 텍스트의 지위를 성취해낸 것처럼 보이는 김유림 작가의 작업은 헤럴드 제만의 “태도가 형식이 될때”라는 전시 기획에서 작품 자체보다 개념 설정이나 작업 과정 등 컨텍스트 중시하였던 것을 연상케 한다. 작품은 거의 비워둔 상태처럼 보이지만 그 비워둔 지점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그곳에 정작 표현하고 싶었으나 표현할 수 없었던 마음 깊숙히 있는 것들에 대해 더 깊이 느낄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마치 미세한 묵언의 웅변을 하는 듯한 김유림 작가의 작업은 그러므로 ‘비워진 언어’로 표현하고 있으나 ‘채워진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책의 형식 안에 담아낸 감각의 언어는 텍스트라는 개념에서는 비워낼 수 밖에 없고 비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감각이라는 개념에서 보게 되면 가득 채워진 것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관객 역시 구체적인 무엇을 읽어내려 하다면 실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작업에는 아무것도 쓰여져 있거나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각의 눈을 열어 그곳에 스며있는 작가가 작업하는 과정에서 쏟아놓은 것들, 즉 작가 내면의 느낌과 정서를 느끼고자 한다면 구체적 무엇을 읽어내는 것보다 더 많을 것들을 감각할 수 있을 것이다. 글 뿐만 아니라 예술 작업 역시 맥락과 관계를 읽어낼 때 진정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라면 김유림 작가의 ‘비워진 언어’라고 지칭되는 작업은 비워진 그곳이 아니라 비워진 그곳을 만들어낸 상황과의 관계, 그리고 언어화 할 수 없었던 마음 속 한켠과 그러한 정서를 만들어냈을 상황과의 관계를 상상하는 가운데 작업을 읽어갈 필요가 있다. 그때 작가의 작업과 그가 공유하고자 하였던 내적 영역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훈, 미술평론가 (2021)
초월적 읽기, 김유림의 북오브제
김유림의 북오브제는 언어의 납골당에서 부활하는 실존의 형상이다. 언어의 무덤 위에 세운 무언(無言)의 묘비는 현실적인 형태와 언어를 상실했다. 그러한 내적 상실을 애도하기 위해서, 또한 말할 수 없는 언어의 잔해들을 위해서, 읽기 불가능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그것은 제의적이며, 초월적인 방식으로 변신한다.
북오브제는 언어의 한계를 드러내며 동시에 넘어서는 이중적인 존재이다. 책은 네모난 책의 모양을 탈피해서 제각각의 모양을 띤 사물과 비(非)의미가 결합된 것이다. 책들은 사물의 분절들로 이루어진 문장 그 자체로서, 언제든지 변화 가능한 ‘사물 자체’의 언어이다. 이 비(非)언어적 형상들은 전도된 언어의 가치를 창조한다. 그래서 김유림의 북오브제는 일반적인 언어체계 안에서 도저히 읽을 수 없으나 읽기를 넘어서는 초월성을 지닌다.
초월적인 것은 추상적이고 개념적으로 세상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언어와 마음, 물성과 비(非)물성의 간극을 메우는 반복적인 신체의 수행성으로 초월적인 것을 생성한다. 예컨대 책의‘갈피’를 잡는 행위는 작가의 주체적 실존과 시간을 증명한다. 갈피는 겹치거나 포갠 것의‘사이(in-between)’를 지칭하는 낱말로서, 한지를 포개어 쌓는 행위의 부단함 속에 자리한다. 매 순간 변화하는 정신과 신체가 질료에 투사되는 반복으로 시간을 채워나가는, 미세한 ‘변증법적 차이’를 생성하는‘반복적 쌓기’이다. 요컨대 이러한 미세한 차이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동일성을 해체하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 중 하나이다. 그것은 쌓으면서 내려놓고, 채우면서 비우는 것이다.
열림의 형태, 무조(無調)의 변주
한지의 끝에서 만들어지는 미묘하고 어른거리는 형상은 현상학적 열림이다. 아그네스 마틴은 가늘고 여린 연필 선(線)을 모눈 종이 위에 반복적으로 그리는데, 그 선은 손의 힘에 따라 울퉁불퉁하게 그리드와 겹쳐진다. 그리고 그 선들은 관객의 위치와 상호작용에 따라서 매번 다르게 보이는 효과를 낸다. 이러한 현상학적인 관점에서 작품은 열린 형태를 제안한다. 김유림은 한지를 겹치고 엮어 행간(行間)을 만든다. 일반적으로 북오브제에 사용되는 묶음은 외적으로 하나의 덩어리로서의 책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단위이며, 내적으로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편집을 통해 작품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김유림에게 묶음은 종결을 의미하는 닫힘이 아니라 연속적인 관계와 열림의 구조를 생산하는 지속적인 엮음(weaving)이다.
책의 행간은 사라질 듯 희미하게 이어지는‘그림자 선(線)’이다. 그 선들은 다층적인 관계를 만드는 행간들로 수직과 수평으로 횡단하는 데, 탈중심적이면서 어느 부분도 지배적이지 않다. 그 표면은 숨을 쉬는 살갗처럼, 가변적인 율동성이 내재된 무조(無調)의 평면이다. 작가는 처음부터 작품에서 모든 서사를 제거하고자 했다. 가상적이고 허구적인 서사는 본질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한국 70년대 단색화는 그 선례가 된다. 단색화는 매체의 물성과 신체의 수행성에 집중하면서, 일체의 서사를 배제하고, 그 자리에 깃드는 참된 정신성을 추구한다. 다만 단색화는 회화적 평면에 물성적 속성을 얹는 방식이었다면, 김유림은 북오브제 자체의 물성적 표면을 강조하는 차이가 있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오브제의 환경을 작품의 일부로 수용하는 서구 포스트 미니멀리즘의 가변적인 시간성과 상호적인 연극성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공감각적인 형상-쓰기
작업은 먹의 농담에 따라 한지를 염색하는 것과 한지의 결과 올을 고르는 것이 짝을 이룬다. 책은 먹으로 염색한 한지를 켜켜이 쌓아가면서 부피를 만들거나, 아니면 쌓은 것에 구멍을 뚫거나 뜯어서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형상은 고정된 형태가 없으며 다만 ‘형태되기’로서만 존재한다. 즉, 형상은 닫힌 형태를 지양하는 열린 시간성을 내포한다. 그리고 형상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공감각적인 것이다. 이것을 ‘형상-쓰기(figure-graphy)’라 명명해보자.
형상-쓰기는 의식적인 지각에 선행하는 공감각적 형상이다. 예컨대 형상은 외부로 발산하고 내부로 수렴되는 청각적인 울림같은 비(非)가시적인 힘의 파동이다. 또한 그것은 앙고라 털같이 부드럽고 따뜻한 촉지적 공감각이다. 즉, 형상은 중첩된 공감각적 속성을 지닌 채, ‘쓰여진다.’이러한 형상-쓰기는 등가적인 언어로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형상이 제작된 후, 사후적으로 작품의 제목을 붙여졌다. 제목은 단지 하나의 음운, 최소의 절제된 낱말, 그리고 비언어적 기호들이다. 이렇게 사후적으로 명명하는 것은 언어와 의미를 생산하는 본질적인 체계이지만, 기존의 체계에 종속되기를 꺼리는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요컨대 김유림은 결코 언어의 기표로 표현할 수 없는 불가능한 간극을, 소쉬르의 파롤(parole)처럼 비(非)언어적 요소를, 자신만의‘형상-쓰기’로 복원하고 있다.
따뜻함, 올과 결 내기
‘따뜻함’은 한지를 통해 전달하고픈 그녀의 욕망이다. 초기 작업에서 사용된 ‘양모’는 언어에 대한 불신과 차가워진 마음이 지향하는 감각적 페티쉬이다. 이어 <warm regards,> 2017 전시는 오로지 따뜻함에 대한 주제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유학 시절 양모가 그랬듯이, 그녀는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한지를 선택했는데, 무엇보다 한지가 지닌 따뜻한 물성에서 감각적인 충족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효과를 충분히 살리기 위해서 한지의 섬유질에서 올과 결을 미세하게 골라서 깃털같이 뽑아낸다. 손끝의 체온을 전달하듯, 한지를 꼼꼼히 뜯어내어 온기를 살리는 수공적인 노력의 결과로 형상은 앙고라 털처럼 포근하게 감싸는 은은한 온기를 머금게 된다. 또한 손 작업은 한지에서 인공적인 차가움을 제거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다. 이렇게 탄생한 온기는 형상 전체를 감싸고 주위에 어른거리는데, 윤곽을 흐리기보다는 애초에 뚜렷한 윤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정형적인 온기의 형상, 온기의 물성이다.
얼룩, 무루(無漏)와 유루(有漏) 사이
먹은 본래 재(ashes), 즉 그을음을 모아 아교를 섞어 압착한 물질이다. 그래서 재는 가볍게 날리듯 물을 매개로 한지에 스며든다. 그러나 먹은 때때로 묵직한 바위 같은 무게감을 지닌다. 루(漏)는‘틈이 나다’, 또는‘번뇌’를 의미한다. 불교적 용어로 무루는 깨달음의 상태, 번뇌 없음, 유루는 틈이 있다, 번뇌 있음을 의미한다. 삶의 번뇌는 어떤 모습일까? 그 번뇌는 언어의 무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하고 전달하려는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고 싶어요...”근원적인 욕망은 윤리적 실천으로 나아간다. 언어의 열반은 집착을 내려놓고 비움으로 가는 무루의 상태일 것이다.
현대철학에서 재(ashes)는 타고 남은 흔적(trace), 잉여(excès) 등의 타자성을 상징한다. 그것은 의미화될 수 없는 ‘공백’이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먹이 그런 타자성을 압착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얼룩은 그러한 타자의 형상이며, 의미가 아니라 존재이기 때문에 치열하게 비워도 끈질기게 되돌아오는 그 무엇이다. 그리고 때때로 폭력적이다. 타자와의 만남이 모두 환대와 사랑으로 규정되는 것이라면 모든 초월성은 사라질지 모른다. 그래서 그 만남은 다른 편의 적대와 증오의 극단 사이를 오간다. 그것은 양극단 사이에서 나를 나로부터 극복하게 만드는 근원적인 것이 된다. 얼룩은 사랑과 고통 사이에 존재하는 초월적 형상인 것이다.
관계, 새로운 시작
김유림에게 북오브제는 모든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든든한 지지대이다. 그래서 새로운 관계는 책에 덧붙여지는 또 하나의 언어이다. 나뭇가지와 책의 거리는 관계의 낯설음과 친밀함 사이에서 수평적 평형을 이루며 멀어지고 가까워진다. 그리고 타인을 알아가는 과정을 먹이 스며드는 시간과 농담의 차이로 표현한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쌓아가고 덧붙이거나 또는 허물고 비우는 방식 안에서, 김유림에게 북오브제는 자신의 역사를 담고 있고 자아의 정체성이다. 또한 그것은 반드시 신체의 행위로서 조성되는 체험의 장이다. 김유림의 북오브제는 언어가 중지되면서 동시에 시작되는 자리로서, 참신한 창조적 공간으로 도래할 것이다.
이지현, 미술평론가 (2020)